“넌…내 아들이다!!!”
아버지의 음성이 미세하게나마 떨리고 계시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하지만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는 결심하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습니다. 전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아버지를 항상 존경해왔고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철들고 부터는 단 한 순간도 그 마음이 변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이제 어쩔 수가 없습니다.
혜미는 아버지와 같은 피가 섞여 있습니다.
하지만 저와 혜미는 그렇지 않습니다.
저와 혜미에게는 같은 피가 조금도 섞여있지 않습니다.
저와 혜미는 사촌남매가 아닙니다.”
“너…너…!!! 서…설마…지금까지 줄곧 그런 생각을…그…그런 생각을..품고…”
“아닙니다!”
나는 단호하게, 짧고 힘있게 아버지의 말씀을 부정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아버지.
“아닙니다, 아버지.
모든 것은 제가 방금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철들고부터는 한번도 아버지에 대한 자식의 마음을 거스려 본 적이 없습니다.
사춘기 때의 치기어린 반항심을 가져 본 적은 있습니다.
사춘기 후에도 개인적인 고민을 안고 잠시동안의 방황을 가져본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에도 아버지에 대한 마음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언제나 아버지를 존경해 왔고, 아버지의 말씀을 항상 가슴 속에 안고 살아왔습니다.
저를 위해서 오늘 날까지 아버지께서 주신 큰 사랑과 은혜에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의 성을 저에게 주신데 대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 저는 언제 어디서든 떳떳이 밝히고 자랑스러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혜미의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어쩔 수 없습니다.
방금 아버지께서 저에게 들려주신 말씀은 충분히 알겠습니다.
저도 머리 속이 어지럽습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뜻밖의 말씀에 당황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 일을 풀어나가야 할지, 지금 확실히 정리도 되지 않고, 답답한 심정입니다.
마땅한 대책도 달리 떠오르지는 않습니다.
다만 한가지…한가지 사실만큼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아직 머리 속에서 명쾌히 이 상황을 정리할 수는 없지만…
제 가슴이…제 가슴 속에서 한가지 어떤 느낌만은 강렬히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그것은…절대로 혜미를 이런 식으로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적어도 제가…제가 이대로 혜미를 가벼이 포기하거나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확신입니다.
저는 혜미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모든 것을 그 애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혜미의 저에 대한 마음 또한 마찬가지일거라고 확신합니다.
혜미가…혜미의 어머니께서 그런 삶을 살아왔다는 사실을 이제 알았기에…
이제야 비로소 알았기에…
혜미 자신조차도 알지 못했던 혜미의 아픔과 상처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이제야 알았기 때문에…
그리고…죄송스러운 말씀입니다만…
저 또한…한때나마…잠시나마…
혜미와 같은 심정을 가져봤었기에…겪어 봤었기에…
더더욱 이대로 혜미를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할아버지께서…큰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모든 분들이…
혜미의 외할머니와 어머니를…그런 식으로 세상의 싸늘한 구석으로 그렇게 내팽겨쳤습니다…
그분들을 한평생 불운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또 다시…똑같은 일이 혜미에게 벌어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건 너무나 가혹합니다.
너무나 가혹한 일이…잘못이…
또다시 예전처럼…지금 이 순간 다시 반복되려 합니다.
잘못을 알면서도 그 업보가 그대로 다시 돌아온다고 막연히 자포자기하고 체념할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우리가 막을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막아야 합니다.
생각을 바꿔서라도 막을 수 있다면 막아야 합니다.
지금 이대로 혜미를 내팽겨쳤다간…
그랬다간…
혜미는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건 비약이야!”
아버지께서 다소 흥분하신 목소리로 소리치신다.
“그건 네가 너무 비약하는거야.
내가 결코 혜미를 내팽겨치겠다는 뜻은 아니다.
이제부터라도 내 조카라는 사실을 알았으니…
결코 그애가 힘들게 살도록 그냥 내버려두진 않겠다.
나름대로 방법을 강구해서 그 아이를 도울 수 있는 방향으로 생각해 보겠다.
그 아이는 이제 혼자가 아니야.”
“지금 혜미에게는 그 사실이 현실로 다가오질 않습니다!”
아버지께서 나의 단호한 어기에 조금 놀란 눈으로 바라보신다.
“문제는 지금 이 사실이…이 가혹한 현실이…
혜미에게는 풀지 힘든 숙제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그 아이에게는 힘든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고통보다도 더 큰 고통인 것입니다.
참기힘든 현실인 겁니다.
지금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다소 누그러뜨린 말투로 말씀을 하신다.
“그래서…어쩌겠다는 것이냐…지금 이 상황에서 도대체 뭘 어떻게 하겠다는 말이냐…”
“서두른다고 해서 될 일은 아니겠지요.
우선 제가 혜미를 만나보겠습니다.
혜미에게 제가 할 수 있는…모든 것을 하겠다고 할 겁니다.
말을 듣지 않는다면 설득하겠습니다.
그리고…아버지와…가족들과 다시 상의하겠습니다.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현실적으로 다시 상의하겠습니다.”
“…………………”
“죄송합니다, 아버지. 혜미를 위해서라면…어쩔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그들 모녀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혜미의 어머니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또 다시 혜미를 그렇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 아이를…그렇게 망칠 수 없습니다…
그 아이를 사랑합니다.”
눈물이 흐르려 한다.
혜미…혜미 때문이다…혜미 때문에 눈물이 흐르려 한다.
혜미야…
이미 눈물이 글썽이고 있다.
아버지께서 말씀없이 나를 응시하고 계시다.
말없이 그렇게 나의 얼굴을…내 눈빛을 응시하고 계시다.
아버지의 눈빛은 지금까지 당혹함과 분노가 얼룩져 계셨다.
그 눈빛이 조금씩…조금씩 부드러운 눈빛으로…
뭔가 체념의 눈빛으로 조금씩…
그렇게 바뀌어가고 계시다.
“재성아…!”
아버지께서 부드러운 음성으로…한없는 관심이 서린 어투로 천천히 입을 여셨다.
“재성아…내가 원망스러우냐?”
“…아닙니다. 원망스러웠던 시기는 이미 모두 지났습니다. 원망하지 않습니다.”
“…………….”
아버지께서 가볍게 한숨을 내쉬신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말씀을 이어나가신다.
“모호하구나…네가 뭔가…내 앞이라서 뭔가 말을 돌리고 있어서 그런진 몰라도…
네가 하는 말도 너무 모호하기만 하다.
너의 확신과 어떤 의지는 충분히 느낄 수가 있지만…
뭔가 뚜렷한 방안이란게 없구나.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는 네 자신은 얼마나 괴로운 심정일지 이해할 수는 있다…”
“………………….”
“항상 너에게 많은 관심과 나름대로의 정성을 쏟았다.
나도…지금의 네 어머니도…
친아들처럼 소중히 아꼈다, 맹세할 수 있다.
하지만…하지만…결국은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냐…
사람이 지은 죄는...잘못은…
결국 이렇게 부메랑이 되어 자기자신에게로 돌아오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냐…
돌아가신 네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었다.
꼭 너를 훌륭하게…바르게 키우겠다고.
우리가 네 선친과 네 어머니에게 지은 잘못을 반드시 보상하겠노라고…
나는 그렇게 약속했었다.
나도…김 검사도 모두…그렇게…
아아…생각해보면 너무나도 어리석고 철이 없었다.
자부심과 공명심, 냉철한 지식과 현실감각은 있었지만,
따뜻한 가슴과 인간에 대한 동정,
자신의 잘못을 고칠 줄 아는 용기와 겸손함은 우리의 입에서만 존재할 뿐,
실제의 행동에는 전혀 없었다.
법은 기본적으로 인정을 고려하지는 않는다.
하지만…하지만…우리는 그 때 확실히…틀림없이 잘못을 한 것이다.
좀 더 지혜롭게 행동하지 못하고…서투르기 짝이 없는 어리석음을 저질렀다.
우리의 그런 어리석음과 무지가…결국 잘못된 판단과 판결로 네 아버지를…
사실은 아무 죄가 없었던 네 친아버지를…
다시는 올 수 없는 머나 먼 길로 떠나보내 버렸다.
그리고…그리고 결국…그 어리석음으로…네 친어머니마저도…”
아버지의 음성이 조금씩 떨리신다…
결국 말씀을 잇지 못하시고 조금씩 흘러내리는 눈물을…손등으로 훔치신다.
회한…
저 눈물은 회한의 눈물이다…
죄 없는 한 사람을…잘못된 판결로 인해…
아버지…
내 눈에서도 참을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말았다.
두 줄기 눈물이…
내 뜨거워진 두 볼을 더 뜨겁게 적시며 흘러내리고 만다.
입술을 꼭 다물고…소리를 내지 않으려 참아본다.
“너에게…너를 통해서 내가 저질렀던 잘못을 모두 지우려 했다.
너를 훌륭하게 키움으로써…나의 죄를 보상하고,
돌아가신 네 부모님들의 영혼을 달래려 애썼다…
너를 처음 봤을 때부터…너의 강함과 따뜻함에 끌렸다.
밝고 강하게 자라주는 너를 보며 뿌듯했고…
자랑스러운 아들 하나를 얻었다는 사실에…언제나 감사드렸다.
너를 보며 상처입은 마음을 달랬고, 너를 보며 새로운 기쁨을 얻었다.
하지만…하지만……그러한 모든 것들도 결국은…
나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또 하나의 이기심에 지나지 않았나 보구나…”
아버지의 상심이 느껴진다.
아버지의 슬픔이 말씀 속에 깊게 배어나온다.
혜미…
혜미가 생각난다…
아버지께서 방금 말씀하신…
따뜻한 가슴과 인간에 대한 동정…
어느샌가부터 나 자신도 점점 잊어버리고 있던 그런 감정…
단 한번 스쳐지나가는 낯모르는 노숙자에게마저도 조금도 소홀히 대하지 않던 혜미…
그 마음…그 따뜻함…
나를…메말라가기만 하던 내 마음 속 깊은 감성을 다시 끄집어내도록 해 준 그 아이…
널…널 혼자 내버려 둘 수 없어…
그런 널 혼자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넌 혼자가 아니야…
“아버지…아버지께서는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저는 진정으로 아버지를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모든 슬픔과 좌절과…아픔을 모두 묻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지금은 혼자가 아니라서…혼자가 아니라서…
아버지를 거역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버지에게 슬픔과 분노를 안겨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실망을 안겨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혜미가…혜미를 그렇게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그래…”
나는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의 표정은…어떤 체념과 상실감이 가득 배어계시다.
아버지께서 말씀을 이으신다.
“그래, 같이 생각해보자.
우선 급한 일부터 풀어나가 보자꾸나.
하지만…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구나…조금만 더 시간이…
아아…어떻게 해야 할지…나도 아직 너무 혼란스럽구나…
내가 너무 가벼이 생각한 것 같다…
뭔가 일을 처리하는 순서가 뒤바뀌어 버린 것 같구나…
우선…네가 혜미를 만나보거라…
우선…만나보고…다시 우리 셋이서 모여서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어떤…결단이 필요할 것 같구나…
하지만…지금은 너무나 어렵게만 다가온다…”
창 밖을 내다본다…
어느 샌가…비가 내리고 있다…
얄궂은 날씨…
얄궂은 날씨보다 더 얄궂기만 한 사람의 운명…
힘들기만 한 반복되는 굴레여…
혜미야…
혜미야…널 내버려두지 않을께.
이대로 널 아프게만 하지 않을께…
혜미야…
오빠랑 함께 풀어나가자…
우린…잘할 수 있을거야…
반드시…
꼭…
꼭 반드시…
잘 될거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비가 내린다…
변덕스럽고 얄궂은 날씨…
험상궂음…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게 만드는 이 불쾌함…
비를 맞으며, 혜미는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마음이 싸늘해져 간다.
머리 속은 여전히 혼란스럽고, 뭔가 어지러운 생각들이 난무하고 있다.
그러한 상태에서…어떤 제대로 된 냉철한 판단력이 세워지질 않는다…
아아…싫어…정말 싫다 이런 느낌은…
제어가 되질 않아…나의 마음이…
현기증…
어느샌가부터 계속해서 나타나는 현기증…
꿈을 꾸는 듯한 몽롱함…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할 수 없는 이 공허한 마음…
어디론가 부웅 떠버린 나의 넋…
혜미는 자신의 발걸음이 무겁게 느껴지고 몸이 비틀비틀 거린다는 사실을 느꼈다…
이미 모두 사라져버린 줄 알았던 취기가…아직도 살아있는 것일까…
내 몸을 아무 곳에나 맡겨버리고 싶어…
될대로 되라…될대로 되어버려라…
어떻게든…어떤 식으로든지…끝나버려라…
집 안으로 들어서니…
아버지가…성태가 앉아있었다.
술냄새가 확 풍겨온다.
후각을 자극하는 불쾌한 이 냄새…
성태가 약간 희미해진 눈빛으로 집 안으로 들어서는 혜미를 바라본다.
혜미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윗층으로 올라간다.
“비 맞으면서 어디를 돌아다닌 거냐…”
“…………”
혜미가 아무 대답없이 그냥 윗 층으로 올라가려 한다.
“말이 안들리는게냐!!!”
“여기저기 돌아다녔어요. 술…너무 많이 드시지 말고 주무세요.”
혜미가 한마디 힘들게 내뱉았다.
그렇다…정말로 힘들게…
한마디를 그렇게 내뱉았다.
목소리에 감정이라곤 실려있지 않았다.
어느샌가…언어를 잃어가는 듯 하다.
“허!”
성태가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뜨리며 그런 혜미를 괘씸하다는듯이 노려본다.
혜미는 아랑곳 없이 그냥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혜미는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침대에 털썩 주저앉더니…그대로 누워버렸다.
그리고 팔을 들어올려 팔등으로 눈을 막고 호흡을 내쉬었다.
정신이 몽롱하다…
꿈을 꾸는 것만 같다…
몸과 마음이…모두 취해버린 것만 같다…
아무 생각도 나질 않는다…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아…
그냥 이대로…
그냥 이대로 잠들어 버렸으면…
혜미는 그대로 조금씩 조금씩…자신의 의식이 희미해져 감을 느끼고 있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아무리…아무리 전화를 해도…
받질 않는다…
혜미가 받질 않아…
이 빌어먹을~!!!
나는 문자를 넣었다.
“혜미야? 자고 있니? 나 지금 너희 집으로 갈께.
우리 둘이 이야기 해보자…우리 둘은 잘 할 수 있어.
오빠가 약속할께…문자보면 나와 줘…가면서 연락할께.”
나는 혜미에게로 갈 것이다.
사랑하는 혜미에게로…
너 혼자 내버려두지 않아…
너 혼자 내버려두지 않아…
사랑해 혜미야…
오빠가 가고 있어…
기다려 줘…!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어떤 인기척에 혜미는 번쩍 눈을 떴다.
방 안에 그대로 켜져 있는 불…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에 누워있는 자기자신…
익숙한 천장의 문양…
아주 잠시동안…찰나의 시간동안 혜미는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곧…자신이 잠이 들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시 인기척에 혜미는 소리나는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자신의 백 속이다…
백을 열어보니…
진동으로 맞춰놓았던…
핸드폰이었다…
계속 울렸는데 잔다고 몰랐나 보다…
역시…재성에게서 여러 차례 연락이 와 있었다…
문자가 온 모양이다….
읽어볼까 말까…
혜미는 흐릿한 의식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그 때…
방문이…스르르 열리고 있다.
열린 방문 사이로…낯익은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아버지 성태였다.
혜미는 핸드폰을 도로 집어넣으며…
물끄러미…표정없는 얼굴로…
방 안으로 비틀거리며…잔잔한 사나움을 안고 들어서는 성태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낯익은 모습…익숙한 모습이다…저런 모습…
성태가 다소 비틀거리며…사나운 표정으로 방 안으로 들어섰다.
잠시 말없이 혜미를 노려보는 눈빛이 사나웠다.
다소 떨리는듯한 목소리로 혜미에게 말을 건넨다.
“너…지금 뭐하자는 거냐?”
“……………………..”
술냄새가 확 풍겨온다…
역겹다…불쾌한 이 냄새…
“너…내가 우습게 보이는거냐?”
“…………………….”
“요즘들어 어지간히 풀어줬더니…간이 배 밖으로 나온거냐?”
“……………………..”
“대답해!!!”
성태가 버럭 사납게 소리쳤다.
그런 성태를 혜미는 아무 말 없이…표정의 변화도 없이 그냥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런 혜미의 반응에 성태는 더욱 알 수 없는 초조함과 다급함이 느껴졌다.
“뭐야? 그 표정은!!!”
“아버지…!”
혜미가 말문을 열었다.
“아버지…저 집에서 나갈께요…”
“뭐?”
성태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집에서 나갈께요…”
“허! 어디로? 어디로 가겠다는 말이냐?”
“몰라요, 알아봐야죠. 하지만 나갈거에요.”
“그 재성이라는 녀석과 동거라도 먼저 시작하겠다는거냐? 그런거야?!!”
“그런 일은 없을거에요.”
“뭐야? 그럼 도대체 뭐하자는 거냐!! 무슨 꿍꿍이야!!!”
“그러는게 나을 것 같아서요. 회사에는 사직하겠다고 했어요. 일자리도 새로 알아볼거에요.”
“뭐?!!………………..”
성태가 더욱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주 제멋대로구만…이거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거야!!!”
“어차피…좋아하는 일이었지만 어차피…병가도 많았고 안 좋은 일이 많았어요.
뜻하지 않게 나 때문에 이래저래 팀원들에게도 폐를 많이 끼쳤구요.
그 사람들마저도 더 이상 곤란하게 만들 순 없어요.”
“………너 지금 말 돌려서 날 욕하는거냐? 그게 다 내 탓이라고..?응? 그런거야??”
“어차피 지나간 일이잖아요, 돌이킬 수 없어요, 앞으로는 그러기 싫다는거죠.”
“훗!!”
성태가 콧방귀를 뀌며 더욱 더 사나운 눈으로 혜미를 노려본다.
“그래…그것도 그렇긴 하네…좋아, 소원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겠지.
나가서 새로 직장 알아보는 것보다 신부수업이라도 하는게 좋겠군. 흥!”
“결혼도 안할거에요.”
“뭐야!!!”
성태가 뜻밖의 말에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너…너…지금 그게 무슨 말이냐!!!”
“그 사람이랑…헤어졌어요. 다 끝났어요.”
“무어!!!”
성태의 눈이 커졌다. 뜻 밖의 말에 어이없다는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그 사람한테 바이바이 했어요. 다신 안만날 거에요.”
“너 정말!!!……”
성태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혜미를 이글이글 타는 눈빛으로 노려봤지만,
혜미는 조금도 놀라거나 표정변화조차도 없었다.
“너…너…도대체 뭐야…!! 너 지금 도대체 무슨 수작이야!!!
서…성욱이랑도 그런 식으로 끝을 맺더니…
지금 와서 또….뭐하자는거야 도대체?
너…너 지금 날 골탕 먹이자는거냐?
내가 어떤 처지인지 뻔히 알면서….
어떻게 감히…감히!!!”
혜미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무표정으로 흥분을 주체못하는 성태를 주시했다.
“너…! 너…! 이…이…흥! 밖으로 돌아다니면서…창녀같은 짓은 다하고 다니는가 보군!!”
흥분할대로 흥분한 성태가 금방이라도 달려들듯한 기세로 한걸음 다가섰다.
“피는 못속이는가 보죠…엄마랑 나랑 하는 짓이 똑같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뭐야!!!”
자신을 똑바로 쏘아보며 내뱉는 혜미의 이제까지 없었던 당돌한 대꾸에 당황한 성태가 무섭게 소리질렀다.
“아빠 입으로 그렇게 말씀 안하셨어요? 전 그래서 줄곧…
아! 그렇구나! 내 몸에는 그런 피가 흐르고 있었나 보다…하고 생각하고 있었죠.”
“너!! 너…정말!!!”
성태가 무섭게 들이닥치며 철썩~!!!하고 혜미의 뺨을 후려갈겼다.
혜미의 고개가 홱 돌아가며 침대에 털썩! 쓰러져버렸다.
“이 년이 어디서!!!”
성태가 곧바로 혜미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움켜쥐고 고개를 사납게 들어올렸다.
그 다음 순간…
성태는 흠칫! 하며 몸 속에 어떤 전율을 느꼈다.
혜미의 눈빛이…
눈빛이…
퉁퉁부어오른 새빨개진 뺨을 조금도 돌보지 않고…
그냥 이글이글 타는 듯한 눈빛으로 성태를 노려보고 있었다.
“뭐…뭐야…이건…!”
성태는 자신도 모르게 깊은 곳에서부터 떨려오는 어떤 반응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서 자기자신도 모르게…혜미의 머리채를 움켜쥔 손에 힘이 스르르 풀려버렸다.
“쿨럭! 쿨럭!”
성태의 손에서 풀려난 혜미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더니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잠시의 침묵을…성태는 견디기가 어려웠다…
“너…! 너…또 다시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간 가만 내버려두지 않겠다!!”
“…………재성 씨랑은 끝났으니 그렇게 알아두세요…”
“도대체 뭐n!!! 도대체 어째서 지금 꼭 그렇게 해야 한단 말이냐!!!
지금 내 형편이 어떤지 모른단 말이냐!!!
어떻게 해서든지 어떤 해결방법이 필요하단 말이다!!!
그 친구 집안의 도움이라도 끌어들어야 할 판이란 말이다,
너 내가 죽는 꼴을 보고싶어서 그러는거냐??!!!”
“그 집에서 도대체 무슨 도움을 받겠다는 거에요!!!”
혜미가 사납게 소리를 지르며 고개를 홱 돌려 성태를 노려본다.
성태가 섬뜩함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혜미가…혜미가 씩씩거리며 흥분하고 있었다…
혜미의 저런 표정을…
성태는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저 아이에게….저 아이에게….
어떻게 저런 표정이 있을 수가 있는거지…!!!
“그 집이 어떤 집인데요? 그 집에서 무슨 도움을 받겠다는 건데요!!
그 집이 어떤 집인지 가르쳐 드려요??
엄마 집이에요…
엄마 집안이라구요~!!!”
“뭐…뭐…?”
성태가…놀란 성태가 눈을 크게 뜨며 혜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시겠어요? 엄마 집안 사람들이라구요!!!
아빠가 고아로 만들어버린 엄마 집안 사람들이었어요.
알고보니 그렇더군요!!!
엄마는 고아였다면서요?
아빠가 계속 나한테 그러지 않았어요?
엄마는 고아였다고요.
모르셨어요? 모르고 계셨어요?
정말 모르고 계셨어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셈이셨어요??
끝까지 그럴 셈이셨어요?
더 알려 드릴까요?
재성오빠 아버님이 누군지 알려드릴까요?
임성규라는 분이시더군요,
우리 엄마…임옥임의 배다른 오빠더라구요!!
제 외삼촌이더라고요!!!
그 아들 임재성이 바로 제 사촌 오빠고요!!!
내 오빠라구요!!!
이제 아시겠어요?
왜 그 집에서 얻어먹을거 하나도 없게 된건지???
이제 아시겠어요??
제가…제가…사촌오빠랑…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제가…제가 이래요…
이게 저에요…
아빠랑…사촌오빠랑…이게…이게…바로 저에요!!!
아시겠어요???
이제 속이 시원하세요??”
“너…너…!”
성태가 자신도 모르게…비틀비틀 거렸다…
이…이런 씨팔…!!!
뭐…뭐야…이게….이건…이건..!!
“후후후훗!!!”
혜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싸늘한…
싸늘한…냉소가…
성태가 경악에 가득 찬 눈으로 혜미를 바라보았다.
혜미가…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눈빛….그 눈빛에…증오가 가득하다…
마치…딴 사람을 보는 듯 하다…
저 아이가…저 아이가…!!
혜미의 싸늘한 말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더 듣고 싶으세요?? 더 들려 드려요?
무슨 말을 들었는지??
안 태훈이라는 이름도 들었어요.
임성규 씨가…재성오빠 아버지가 그 이름을 가르쳐 주더군요.
안.태.훈!!! 이라는 이름을요!!!”
“너..!! 너…!!”
성태가 더욱 더 경악하며…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무시무시한 공포 속에서…성태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며 극도로 흥분하고 있었다.
“사진도 봤어요…
안태훈 씨의 사진을요…
아는 얼굴이더군요…
아는 얼굴이었어요…
어릴 때…집 근처에서 봤던 사람의 얼굴….그 얼굴….!!”
둑!
마치 터져버린 둑 속의 물이 일순간에 무서운 기세로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마음 속 깊고 깊은 곳에서 억눌려져 있던 혜미의 한이…
깊고 깊은…차갑고 차가운…억눌리고 뒤틀린 한이…
일순간에 무서운 기세로 터져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혜미의 말소리가 허공에서 맴도는 듯…공허한 울림으로 변하고 있었다.
혜미의 눈빛은 이제 성태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어느샌가 혜미의 얼굴은 멍한 표정이 되었고…
그 눈빛조차도 멍하니…성태가 아닌…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움켜쥐려는듯한 그 눈빛으로…
“아빠는…그 분이 누군지…아시죠…”
혜미가 넋이 나간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성태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너….!! 너….!! 무….무슨 헛소리야…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거냐…
너…너…도대체 무슨 이야길 들은거냐!!!
도…도대체 무슨 이야길 들은거야!!!”
성태는 비틀거리며 신음하듯…절규하듯이 토해내는 목소리를 내뱉았다.
혜미가 천천히…눈을 들어…그런 성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성태의 얼굴에서…식은 땀이 흘러내린다…
짐승처럼 급한 숨을 토해내며 씩씩거리고 있었다.
몸은 주체할 수 없을만큼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뭐…뭐야…저건…!!
혜미가 다소 의아스럽다는 듯이 그런 성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혜미의 머리 속이 복잡하게 천만가지의 단상으로 떠올랐다…
안태훈…
레미제라블…
장발 쟝 아저씨…
다정한 웃음, 따뜻한 가슴…인자한 목소리…
장발 쟝 아저씨…장발 쟝 아저씨…
언제부터인가 내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은 장발 쟝 아저씨…
아빠의 싸늘한 태도…
엄마의 슬픈 모습…그리고 있었던 사고…
어느 날 부터…
내 앞에 아저씨가 나타나지 않은 그 날부터…
장발 쟝 아저씨…장발 쟝 아저씨…
안태훈…안태훈…
아빠…? 아빠…아빠…!!
아빠는…그 분은…!!!
뭔가…뭔가…혜미의 가슴 속 저 깊디 깊은 곳에서부터….
뭔가….뭔가가…슬그머니….
부정하고 싶었던 그 뭔가가…
슬그머니 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그리고…그 형체가 점점…
거대한 덩어리를 이루면서…
점차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혜미의 눈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경악에 가득한 눈으로…
고개를 돌려…성태의 모습을 다시한번 바라보았다.
저…저 모습은…저 모습은…
한순간 혜미의 눈이 놀라움과 공포로 가득해졌다.
“아아…!!”
자신도 모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신음소리가 혜미의 입에서 가느다랗게 새어나왔다.
그...그랬던거야?
저...정말로...그랬던거야??
혜미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아아악~!!!”
혜미가 토해내듯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털썩!!하고 주저앉아버렸다.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아니야…
아니야…!!
이…이럴 수는….
이럴 수는 없어…절대로…이건…
안돼…
안돼…
안돼…!!!
“싫어어~!!!”
혜미가 다시 절규하듯 발악하듯이 소리질렀다.
부정하고 싶었다.
부정하고 싶었다.
임성규가 보여준 사진을 보는 순간부터 혜미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이미 어떤 먹구름같은 형체의 의혹이 가슴 속에 가득해 있었다.
그리고 그 형체를 혜미는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하지만….
부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정체모를 확실치 않은 형체를…
부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애써 애써…억눌러가며 부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나고 무시무시한….
거대하고 거대한 공포때문에….
혜미는 순간적인 정신파탄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혜미가 고개를 마구 가로저었다…
아니야…아니야…
이건…아니야…
뭔가 잘못된 거야…
“헉헉…!!”
제대로 숨을 쉬기가 어렵다…
어지럽다…
아아, 이건 뭐야…
이건 뭐야…
싫어…싫어…
혜미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비틀비틀 거리는 걸음으로 방문 쪽으로 다가섰다.
눈 앞이 캄캄하니 아무 것도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다.
그저 비틀비틀 거리는 자신의 모습과 어지러운 혼란만이 느껴졌다.
“으윽~!!!”
다음 순간 어떤 물리적인 충격에 의해 혜미는 비틀거리며 고통의 신음을 토해냈다.
바닥에 털썩 쓰러진 혜미가 뒤돌아보니…성태가…
성태가…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날 밤처럼…
어린 시절…어느 날부터 싸늘하게 변해버린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던 그날 밤처럼…
오늘처럼 비오던 날…
고등학생이었던 자신을 범하던 그 때의 그 순간처럼…
그리고 또 오늘처럼 비오던 날…
자신을 마구마구 무시무시하게 폭행하던 그 날 그 순간처럼….
쏴아아~!!!
울리는 창 밖의 빗소리…
저 비…저 비…지긋지긋한 저 비…
비오는 날의 야간비행에서 자신이 그토록 무서워하던 터뷸런스…
사실은…사실은…
어렸을 때부터의 그 악몽같은 기억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의식의 깊은 곳에서 느끼고 있었던 공포였던 것이다.
저 비…저 비…
듣기 싫은…오싹한 저 빗소리…!!
성태가 혜미에게 달려들었다.
철썩~!!!철썩~!!!처얼썩~!!!
사정없이 내려갈기는 성태의 무지막지한 폭력에 혜미의 몸이 나뒹굴었다.
“으으…!!”
혜미는 나뒹굴며 신음했다.
그런 혜미의 머리채를 성태가 움켜쥐고 사납게 일으켜 세웠다.
처얼써억~!!!
또다시 호된 따귀가 내려쳐졌다.
혜미의 고개가 꺾이며 입술이 터져버렸다.
혜미는 다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성태가 씨익~~!!씨익~!!거리며 무시무시하게 혜미를 노려보며 소리질렀다.
“그래서 뭐? 그래서 뭘 어쩌라구!!! 이 더러운 년!”
성태가 쓰러진 혜미를 발로 내리찼다.
“으윽!!”
혜미가 통증의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철퍼덕 쓰러졌다.
그렇게 쓰러져있던 혜미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억지로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성태가 달려들어 다시 혜미의 머리채를 움켜쥔다.
“아악!!”
“이 더러운 년!!! 무슨 생각하는거야!!! 너 지금 무슨 생각 하고있는거야!!!
이 더러운 년!!! 죽여버릴테다 이 미친년!!!”
성태가 혜미의 머리채를 쥐고 이리저리 마구 이끌어대면서 사납게 소리질렀다.
광기…
광기가 성태의 온 몸과 정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수십 년동안 마음 속 깊고 깊은 곳에 감추어두고 있었던 말할 수 없는 공포와…
현실에서의 절망감이 한데 어울리며…
성태를 미치광이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혜미가 질질 끌려가면서 성태의 팔을 내리치면서 저항했다.
“그…그만해!!!”
성태는 아랑곳 하지않고 큰 소리로 으르렁 거렸다.
“그래!!! 생각해라 생각해라 이 년아!!!
네 마음대로 생각해라 이 년아!!
무슨 소리든지 지껄여봐,
비명을 질러봐!! 울부짖어 봐!!!
그래봤자 내가 눈 하나 깜짝할 줄 알아, 응? 이 씨팔년아!!!”
“으으…하지마…제발!! 흐흐흑흑~!!!”
혜미가 울부짖었다.
어지럽다…어지럽다…혼란스럽다…그만 …그만 해 제발!!!
혜미는 성태의 사나운 폭력에 휘둘리며….
그렇게 흐느끼며 속으로 애원하듯이 절규하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공포가…
그 공포의 실체가…
지금 당하는 고통보다 천배만배의 통증의 무게로 혜미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렇게 혜미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었다.
성태의 사나운 절규…
짐승의 포효같은 울부짖음이 귓가를 자극했다.
“한가지 더 말해줘??응?? 한가지 더 말해줘?? 응?
내가 네 에미를 어쨌는지 알아? 응? 내가 이랬어, 이랬다구!!!”
다음 순간……
혜미의 몸이 계단을 굴렀다.
성태가 계단으로 밀어버린 것이다.
혜미의 몸이 계단을 굴러 떨어져서는 쿵! 하며 바닥에 처박혀 버렸다.
성태는 거의 정신이 나가버린 상태였다.
제정신을 가진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씨익!!씨익!!! 가쁜 호흡을 정신없이 몰아쉬며…
계단을 한걸음한걸음 내려왔다.
“으…으으…!!”
혜미가 신음하며…천천히…아주 천천히 바닥을 기었다…
말로 다 못할 통증이 온 몸에 퍼지고 있었다.
그런 혜미의 모습을 바라보던 성태가 가까이 다가가 혜미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고개를 바짝 치켜들게 했다.
눈!!!
눈!!!
혜미의 이 눈빛!!!
원한과 저주가 한가득 담겨있는 이글이글 불타는듯한 눈!!!
“이…이…!!! 더러운 년!!!”
공포는 인간을 잔인하게 만든다...
성태가 다시 처얼썩! 하고 혜미의 뺨을 내리쳤다.
혜미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으으…!!”
혜미의 입가에서 피가 흐르고…
눈가가 찢어져버렸다…
눈가에서도 피가 흘러내렸다…
혜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눈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냈다.
성태가 미친듯이 절규하고 있었다.
“그래!! 너는 운이 좋구나!!!
네 에미는 일어나지도 못하고 그대로 병신이 돼버렸지!!!
그래, 지금 네 꼬락서니가 딱 그 때의 네 에미 꼬락서니다 이 년아!!!
이 병신같은 것들!!!
변변치 못한 꼬락서니를 보니 딱 제 에비 에미 꼬라지 그대로군 그래!!!
그러게 네 에미더러 누가 그렇게 지랄하라고 그랬냐!!!
어디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지도 못하던 놈이 돌아왔다고, 나한테 죽을듯이 덤벼들었지!!!
병신같은 것들!!!
정말 피는 못 속이는군, 그래!!!
네 에비 에미 한 번 불러봐라 이 년아!!!
도와달라고 그래봐 이 년아!!
내가 널 이대로 내버려둘 줄 알아? 응?
내가 널 이대로 내버려 둘 줄 알아? 응?
웃기지 말라고 그래!! 네 년 끝까지 살려서는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놓을거다!!!
내가 널 놓아줄줄 알고?
네 년은 나한테서 못 벗어나 이 년아!!!”
쓰러져 고통으로 신음하는…
그보다 더 큰 영혼의 상처에 신음하고 있는 혜미의 귓가에 뇌리에…
성태의 짐승같은 절규소리가 청천벽력처럼 하나하나…또렷이 울려퍼지고 있다.
혜미는 고개를 힘들게 돌리며…
원한에 가득찬 눈으로 성태를 노려보았다…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고…입술은 꼭 깨물고 있었다…
찢어져버린 눈가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과 함께 섞이며…
시뻘건 피눈물의 기괴한 형상이 되어…
그렇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성태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 떨었다….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것은…그 떨림은…
다름아닌 성태 스스로가 쌓아올린…
거대한 죄의 진동이었다…
“그런 눈으로 날 보지마!!!”
성태가 미친듯이 소리질렀다…
그리고 탁자 위에 세워져있는 맥주병과 양주병을 혜미의 몸 가까이 바닥으로 집어던져 버렸다.
쨍그랑~!!!
"아악~!!!”
파편이 무섭게 튀어오르며 혜미를 위협했다.
성태가 또 병을 집어던졌다.
쨍그랑~!!!
파편이 튀어올라 혜미의 뺨에 박혔다.
새로운 가느다란 피가 형체를 드러내고, 혜미는 통증으로 얼굴을 감쌌다.
억지로 바닥을 기어 피하려고 발버둥을 쳤다.
아아, 어지럽다…어지럽다...!
감당할 수 없는 몸과 정신과.....
영혼의 고통 속에서 혜미는 안간힘을 다해 발버둥치고 있었다...
이게...이게 꿈이 아닐까...
꿈이었으면...꿈이었으면...
조....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면....
깨어날거야....
깨어날거야....
조금만 더 버티면....
그래, 이건 악몽이니까....!
조금만 더 버티면....
하지만....하지만...!!
희미한 시야 사이로...하얀 형체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한번도....한번도....
깨어난 적이 없어....
그렇게 빌고 또 빌었지만....
한번도....한번도....
깨어난 적은 없었어...!!
혜미의 정신이 흐릿해지며 온 몸에 힘이 쭈욱 빠졌다.
조금전보다 소극적으로 바닥을 기어 몸을 피하는데…
손바닥에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병조각 파편에 손을 찔린 것이다.
혜미는 손바닥을 들어 자세히 쳐다보았다…
상처...피....고통....
이 모든 것이 혜미의 의식 속에서 무의미한 것으로…
모호한 것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손에...손에....무언가가 잡힌다....!
성태의 으르렁대는 짐승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흥! 이 더러운 년,,,내가 널 놓아줄 줄 알아?”
성태가 다가왔다.
성태는 또 다시 쓰러져있는 혜미의 머리채를 사납게 움켜쥐고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허어억....!!!!”
성태의 눈이 믿을 수 없을만큼 크게 떠졌다....
성태는....자신에게....지금 이 순간....어떤 일이 벌어진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주 잠시 후에....어떤 본능적인 의식으로 고개를 살며시 숙이고....
무언가를 확인했다....
자신의 목이....
목이 이상하다....
뭔가 뜨거운 것이....뜨거운 것이 용솟음치는 듯 하다....
자신의 몸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다.
병조각이....병조각이....
혜미가....혜미가....
깨어져버린 병목 부분을 손으로 쥐고 자신의 목을 찌르고 있었던 것이다!!!
용솟음치던 것이....흘러내리던 것이....
자신의 피라는 사실을 성태는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일순간....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공포가...
성태의 온 몸과 정신을 휘감았다......
성태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혜미의 목을 움켜쥐었다....
혜미는 멍하니.....피와 멍으로 뒤범벅이 된 얼굴로....
멍하디 멍한 시선으로.....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마치 허공의 그 무언가를 쫓고 있는 듯 했다....
이젠 잔잔해져가고 있는....
말라가고 있는 피눈물의 흔적....
성태의 머리 속에 한순간 수많은 기억의 단편이 엉키고 엉켰다....
태훈의 모습이....
옥임의 모습이....
어린 시절의 혜미의 모습이....
어린 시절 자기가 갖고 놀다 죽여버린....
다시 되살릴 수 없다는 절망감에....
비뚤어져버린 가학적인 쾌감에 젖어들던 기억들이....
자신의 마음 속에 숨겨놓았던 공포가....절망이....
그 사마귀....
그 사마귀....
놓아줬어야 하는 것일까....
혜미의 목을 움켜잡았던 성태의 두 손에서 힘이 스르르 풀렸다...
숨을 쉬려고 해도...숨이 쉬어지지가 않는다...
“크허헉....!!”
마치 김이 빠져버린 듯한 괴이한 소리가 성태의 입가에서 흐르더니....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서는 이내 몸이 쓰러져 버리고....
그 미세한 움직임조차 점차 잦아들더니....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혜미는....
혜미는....멍한 눈길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응시하고 있었다....
혜미의 눈길이 서서히 아래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닥에 쓰러져 다시는 움직이지 않는 시체가 되어버린 성태의 몸이...
시야에 들어왔다....
혜미는 멍하니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빠....?”
혜미의 입 속에서 가느다란 한 줄기의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그러나....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아빠....? 아빠....”
넋나간 듯한 멍한 얼굴의 혜미의 입에서...
마찬가지로 넋이 나간....
아무런 감정도 실려있지 않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혜미는 자신의 손바닥을 자신의 눈높이로 끌어 올렸다…
그리고 멍하니....
피로 물들어 있는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손바닥을 멍하니 내려다보던 무표정한 혜미의 몸이....
조금씩....조금씩…떨리기 시작했다....
한번의 떨림이 시작되자.....
걷잡을 수 없이 온 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몸뿐만이 아니라.....
몸 속도....
머리 속도.....
심장 속도....
자신의 영혼의 저 밑바닥에서부터....
뭔가가 부들부들 떨려옴을 혜미는 느꼈다.....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손바닥을 뚫어져라....주시했다....
손바닥....손바닥......
손바닥의 형체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손바닥이....손바닥이....
점점 깊고 깊은 늪으로 변해가는 것만 같았다....
“아아.....!!”
자신이 내뱉는 신음소리가 처참하게 들렸다....
그리고....그리고....
자신의 손바닥에....
“아아아…!!”
그 깊고 깊은 늪 속에 진흙창이 아닌...새빨간 선혈이 가득 쌓이고 쌓여....
거대한 힘으로 자신을 그 속으로 자꾸만 끌어당기는 것만 같았다.
“아아아아아악~!!!!!!!!”
혜미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경악에 가득찬 그 신음소리와 크게 떠진 눈...
공포와 절망이 가득 차 있는 처절한 비명소리....
혜미는 그 자리에 힘없이 털썩 쓰러져버렸다.
쓰러져있는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혜미는 비명을 지르며 소리내어 흐느꼈다.
“아악~!!! 흑흑흑~!! 아아...흐흑흑...!!!”
아아...!! 하나님....하나님...!!!
혜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내뻗어 몸 주위의 병조각을 집어들었다.
거대한 절망의 광기가.....
돌이킬 수 없는 체념의 소용돌이가....
혜미의 온 몸을 가득 에워싸며...옭죄이며 놓아주지를 않고 있었다.
온 거실에 가득차 있는 피비린내의 광기가....
창 밖에서 쏟아지는 거센 빗소리가.....
그 처절한 차가움이.....
마치 이젠 아무런 따뜻함도 희망도 없다고 비웃으며 귓가에 속삭이는 듯 했다.
아아....이젠 안돼....!
끝내고 싶어.....
끝내고 싶어....
끝내야 해....
끝내야만....!!
혜미는 병조각을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쥐고 자신의 다른 손목 쪽으로 향했다.
처절하게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가 혜미의 입에서 마치 토해지듯이 흘러나왔다.
“하나님...!! 하나님....!!
이....이젠....이젠....다 끝내주세요....!
이....이제....모두....모두 끝내주세요....!!!”
부들부들 떨리는 손에 쥔 병 조각의 날카로운 부분으로....
혜미는 자신의 손목을 힘껏 그었다.
그어버렸다!!!
새하얀 손목 위로 한줄기의 가지런한 혈선이 이루어지고....
그 혈선의 틈 사이로....처절하리만치 예쁜 선홍빛의 선혈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그 선혈은 삽시간에....
혜미의 희고 고운 손목을 새빨갛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삽시간에....바닥으로 흘러내리며....
거실바닥의 한 부분을 새빨갛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혜미의 몸이 바들바들 떨리며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미 지칠대로 지쳐버린 그녀의 심신뿐만 아니라...
그녀의 그 맑던 영혼마저도 이미 기력을 다하고 있었다...
서서히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희미해져가는 시야와....의식 사이로...
어떤 형체가....
하나의 형체가.....희미하게 떠올랐다.....
그리고…그 형체가…
점점 또렷한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오빠....!
혜미는 안간힘을 다해....
그 형상을 향해....
재성의 형상을 향해....
너무나도 힘겹게...팔을 내뻗으며....손으로 움켜쥐려고 했다.....
형상이 움켜쥐어지지가 않았다....
혜미는 안타깝게....
안타까운 몸짓으로....손을 내 뻗으며....
어떻게든 그 형상을 움켜쥐려 애썼다.....
움켜쥐고만 싶었다....
오빠...!
오빠...!
재성오빠...!!
혜미의 힘없이 감긴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주루룩....흘러내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혜미의 손이 바닥으로 힘없이 털썩 떨어졌고....
의식은 더욱 더 희미해져 갔다......
의식을 잃어가는 혜미의 입술이 아주 살짝 움직이며.....
거의 들리지 않는.....
가느다란 말소리가 새어나왔다....
“사랑합니다....당신....!”
"인간이란
어찌 이리 죄 많은 존재인가
증오하고 비난하고,
상처를 입히기도 하고
그럼에도 용서를 하지 않으면
살아나갈 수가 없다
하지만 용서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그 때..
그렇게나 용서해 주기를 바랐거늘
사람은 망각해 버린다
그리고 다시
똑같은 잘못을 반복한다
미안해요
엄마.."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5-01-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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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
접속일 | 2025-01-24 | ||
서명 | 황진이-19금 성인놀이터 | ||
태그 | |||
황진이-무료한국야동,일본야동,중국야동,성인야설,토렌트,성인야사,애니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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